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침공 (문단 편집) === 세계의 반응 === 프랑스의 처참한 패배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매우 큰 충격을 줬다. 연합군은 구시대적 전략전술로 참패하고 그 일부만이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통해 영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또한 이 작전은 프랑스보다는 영국과 영연방이 중심이 된 철수작전이었다. 그러나 됭케르크가 실패했다면 영 육군 정규병과 소수인 영연방군 병력까지 잃어 아프리카를 비롯한 비유럽 전장까지 손쉽게 내어줬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은 프랑스가 무너지자 홀로 유럽에서 독일과 싸우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독일은 영국에 여러 외교 및 선전 노선으로 평화 협정 사실상 항복을 요구하지만 영국은 처칠의 저 유명한 '우리는 싸울 것 입니다'라는 연설 아래 위로는 조지 6세부터 말단 시민들까지 모두 일치 단결하여 독일에 대항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 돌입하게 된다. >“프랑스 패배의 뉴스를 듣고 스탈린의 신경은 거의 마비지경이었다. 소련은 이제 역사상 가장 막강하고 위험한 세력과 당면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 스스로 이 엄청난 위협에 대처해야 하리라고 느꼈다.” >---- >― [[니키타 흐루쇼프]] 영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혼란에 빠졌다. 이제 독일은 훨씬 강성해졌고 더 이상 양면전선을 걱정할 필요 없이 소련에 선전포고할 가능성이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고려된다. 애초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도 [[제1차 세계 대전]]처럼 영국, 프랑스와 독일이 오랫동안 전쟁을 지속하며 서로 국력을 소모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이렇게 프랑스가 금방 무너질 것이라는 건 스탈린의 계산 밖이었다. [[이탈리아]]는 본격적으로 추축국으로 변절한다. 이는 이탈리아가 과거 1차대전 승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상은 고작 [[이스트리아 반도]]와 1920년 획득한 [[자다르]][* 이것마저도 연합국이 준 것이 아니라 신생 유고와의 타협으로 얻은 것이다. ], 1936년 점령한 [[에티오피아]]의 식민지화에 그쳤고, 이로 인해 축적된 국가적 차원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프랑스 일각에서는 이를 '배신 변절 충격'이라고 평하였으나, 상기한 사건들로 이탈리아 내에서의 분노가 결국 히틀러의 지원군인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을 탄생하게 만들었기에 업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탈리아는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심산으로 말기에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무솔리니의 공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혀' 오히려 프랑스군의 반격에 이탈리아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독일군이 제때 프랑스를 항복시키지 않았으면 독일은 프랑스 남부 전선까지 달려와야 할 뻔했다.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베니토 무솔리니는 창끝을 동쪽의 그리스와 남쪽의 이집트 쪽으로 겨눌 생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독일군의 눈부신 승리에 발맞추어 앞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로부터 칭다오를 탈취해왔던 것처럼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반도 식민지를 노리고 육군 제 5사단을 투입한다. 또한 네덜란드에 인도네시아 식민지 자원의 80% 독점권을 요구하였고 이어 1940년 9월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며 이탈리아 독일 일본의 삼국 동맹을 맺는다. 당연히 영국은 자꾸 자신들의 인도와 말레이 반도 식민지 쪽으로 남하하는 일본에 불안감을 느꼈고 이는 영국에 망명했던 네덜란드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미국은 이러한 일본의 남하 정책과 중일전쟁 지속에 경계하고 있었고 일본이 아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에 눌러앉고 군대를 주둔시키자 1941년 석유 금수 조치를 내리게 된다. 이에 일본은 유럽에서 독일이 영국을 괴롭히고 있으니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처부수면 미국이 협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프랑스는 둘로 나뉘어 북부는 독일의 [[괴뢰]]정부인 [[프랑스 군정청]]이 수립되었고, 남부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했던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프랑스]]라는 독일의 [[괴뢰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프랑스 식민지 대부분이 비시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영국은 식민지 주둔군이 독일의 명령에 따라 본토를 위협할 가능성을 경계하여 식민지의 [[캐터펄트 작전|프랑스 군함들을 기습해 모두 철저하게 침몰시켰다.]][* 이렇게 그나마 남아 있던 해군을 모두 잃어버린 프랑스는 실질적인 통제 수단을 잃어버려 전후에는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게 된다.] 비시 프랑스는 1942년에 독일에게 점령됐고 이는 훗날 미국이 튀니지에 횃불 작전을 펼칠 때 북아프리카에서 비시 프랑스군이 오히려 연합군에게 강력하게 저항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독일군은 점령된 프랑스를 철저하게 억눌러 국가의 외형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분열 억압 통치를 일삼았기 때문에 프랑스가 해방되고 십년이 지나도 독일 점령 이전의 국력의 절반도 회복하지 못했다. 프랑스가 6주 만에 독일군에게 항복했지만 사실 프랑스와 영국은 40만에 달하는 전상자를 내고 10만여명의 독일군을 죽이며 독일군에게 격렬히 저항했다. 스당 전투 초반에도 독일군 중소대급 전투에 일부 방어선이 돌파당한 것을 제외하고 독일군의 도하를 저지하고 있었고 A집단군의 거친 공격도 잘 버텼다. 문제는 낫질 작전으로 마지노선과 딜계획에 투입되지 않고 남은 프랑스 정규군 대부분과 예비군이 전멸하며 프랑스를 반갈죽 내버렸기 때문에 시기의 문제일 뿐 독일의 승리는 기정사실이었다. 하여튼 이처럼 체면도 구기고 국가 자체도 만신창이가 된 프랑스에게 있어서 [[제2차 세계 대전]]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흑역사]]가 되었고 드골을 중심으로한 자유 프랑스가 설립되고 처칠이 독일의 휴전제의를 거부하고 항전 의사를 밝히면서 영국에서는 독일 공군과 영국공군이 항공전을 펼쳤고 전쟁은 북아프리카 지역과 지중해 지역으로 번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